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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다큐-박정희, 린든 존슨, 그리고 베트남전쟁]⑧ 박정희와 존슨의 전략적 눈 맞춤…존슨 "전쟁 승패는 전장에서"…미군 파병 결정

1961년 11월 22일 아침. '창졸간'이란 표현이 정확하다. 어찌 손을 써볼 수도 없는 급작스러운 순간 미국의 국정 책임자가 바뀌었다. 동시에 자유세계를 이끄는 지도자도 바뀌었다. 비극 속에 대통령직을 승계 한지 두 달. 존슨은 연방 상.하원의회 앞에 섰다. 미국은 물론 세계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첫 연두교서는 이렇게 시작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 서지 않기 위해서라면 나의 모든 것을 기쁜 마음으로 내놓았을 것입니다(All that I have I would have given gladly not to be standing here today)." 이 말을 케네디에 대한 애도의 표현으로 분석하는 정치학자들도 있다. 제스처란 뜻이다. 경험과 역량으로 치면 존슨은 누가 봐도 준비된 대통령이었다. 의회민주주의 나라 미국에서 그만큼 의회 경험이 풍부한 정치인은 드물다. 상원 다수당 대표 시절 매사추세츠 출신 상원의원 케네디는 그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주고서라고 이 잔을 피하고 싶었다는 성서적 뉘앙스가 담긴 존슨의 고백은 정치적 수사만은 아니었다. 존슨은 분명 정치적 울렁거림을 겪고 있었다. 케네디는 대통령직을 3년도 채우지 못했다. 그런데도 미국인들은 그를 사랑했다. 이성적 분별력에 기초한 존경심도 있었지만 케네디에게는 본능적 끌림이 있었다. 미국의 대통령 중 존경의 대상은 많다. 한 예로 링컨을 보자. 그의 영도력에 힘입어 두 개로 갈릴 뻔했던 미국은 하나로 존재한다. 그가 승리로 이끈 남북전쟁은 미국의 죄악 노예제도에 종지부를 찍었다.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미국인들은 대부분 조지 워싱턴 다음으로 링컨을 꼽는다. 하지만 링컨은 살아생전 또는 오늘날에도 사랑의 대상은 아니다. 실제로 그는 정적과 비판자에 둘러싸였었다. 보잘것없는 출신 배경 때문에 무시를 당했고 정치적 계산에 따른 조심스러운 행보 때문에 진보진영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미국은 결코 갈라질 수 없다는 신념 때문에 남부에는 원수가 됐다. 케네디는 아니다. 거의 '아이돌' 수준의 사랑을 받았다. 정적 리처드 닉슨은 케네디에 대한 피해의식을 갖고 살았다. 'S&S' 때문이다. 케네디는 지도력의 실체(Substance)를 모양새(Style) 있게 역사에 남겼다. 베를린이 좋은 예다. 1963년 6월 케네디는 20세기 어둡고 아픈 역사의 대명사 베를린을 찾았다. 이 갈라진 도시 글자 그대로 장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케네디는 자유세계가 베를린을 버리지 않을 것을 확실히 해야 했다. 그는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정책을 말하지 않았다. 군사력 강화를 선언하지도 않았다. 대신 케네디는 "나는 베를린 사람입니다(Ich bin ein Berliner)"고 외쳤다. 미국의 대통령이 그가 대표하는 미국인이 베를린 시민이라면 그 도시는 바로 미국이다. 미국은 자신의 땅을 한 번도 그냥 내어준 역사가 없다. 꼭 싸움을 했다. 이렇게 함축적으로 미국의 비전을 힘차게 제시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존슨은 케네디로부터 그가 넘기에 버거운 정치적 유산을 물려받은 것이 사실이다. 20세기 미국사에서 세 명의 부통령이 유고로 인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1901년 9월에 대통령이 된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1945년 4월의 해리 트루먼 그리고 1963년 11월의 린든 존슨. 이 셋이 공통점을 갖고 있다. 전임자의 발자취가 컸다. 그런데도 이들은 모두 독자적 정책을 추진했고 전임자의 '클론' 이미지에서 탈피하는 데 성공했다. 대통령직을 승계한 직후가 중요하다. 전임자에 대한 애도가 깊은 마당에 자신의 정책적 비전을 너무 뚜렷이 제시하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따른다. 하지만 전임자의 족적 안에 머물면 그 또한 수렁이 된다. 정치 감각이 뛰어난 존슨은 투-트랙 방식을 택했다. 첫째 케네디가(家)에 대해서는 극적인 존경을 표시했다. 대통령이 살해되면 부통령은 수도 워싱턴DC로 급히 돌아오는 것이 상식이지만 존슨은 케네디의 시신을 남겨 놓고 갈 수 없다며 케네디가 죽은 달라스를 떠나지 않았다. 통치 공백을 막기 위한 대통령직 승계에 대해 존 케네디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의 조언을 구했다. 대통령 전용기에서 급하게 행해진 선서이었음에도 특별히 케네디가 임명한 연방 법원 판사 앞에서 했다. 남편의 암살을 바로 옆에서 목격한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도 참석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존슨이 선서하는 동안 재클린 케네디가 남편의 피 묻은 옷을 입고 서 있는 슬픈 장면이 만들어졌다. 워싱턴에 도착해서 존슨은 케네디의 시신과 재클린이 먼저 '에어포스 원'에서 내려오기 전 그 누구도 비행기를 떠날 수 없도록 명령한다. 존슨은 대통령이 된 후 곧 행정명령을 발동해 플로리다 Cape Canaveral을 케네디 스페이스 센터로 명명한다. 둘째 존슨은 케네디 정책을 이어 갈 것을 선언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1963년 말 자신의 정치적 한계에 대해 솔직하게 토로했다. "나는 유권자들로부터 통치권을 부여 받지 못했다." 존슨의 말대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가 이제 대통령인 사실에 씁쓸해했고 또 어떤 이들은 감정적으로 도저히 그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케네디와 다른 길을 가는 일은 불가능했다. 케네디의 외교.군사.안보 정책의 삼두(三頭) 마차를 존슨은 그대로 끌고 갔다. 국무장관 러스크 국방장관 맥나마라 안보보좌관 번디를 "여러분을 임명한 케네디 대통령보다 내가 여러분을 더 필요로 한다"며 남아있게 했다. 그렇지만 존슨은 조용히 전임자와의 차별화를 시작했다. 베트남전쟁이 탈(脫)-케네디의 첫 무대였다. 그는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다른 나라들을 미국처럼 만들기 위해 사용했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된 후 그가 외교.군사.안보 라인에 제시한 정책 기조다. 저개발 신생국에게 잘 훈련된 게릴라와 싸우면서 동시에 민주체제와 경제발전을 이루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라고 했다. 케네디의 자유주의 나라 만들기(Nation Building)에 대해서는 아시아인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더 잘 알 것이라 했다. "한 주 만에 번영하는 20세기 현대 국가를 만들지 못해도 너무 비판하지 마라"는 것이 존슨의 결론이었다. 전장이 우선이란 뜻이다. 존슨의 생각은 베트남전쟁에 대한 박정희의 입장과 다르지 않다. 군인 박정희에게 전쟁의 승패는 전장에서 갈리는 것이었다. 또 호치민과 마오쩌둥이 적장이었다. 박정희는 공산세력의 위협을 받고 있는 나라에서 '미국식 민주주의'를 복제하려는 시도에 비판적이었다. 케네디는 아니었다. 월남 지도자들을 자유주의 나라 만들기 독트린으로 설득하고 군대에는 전문성을 심어주면서 월남의 농부들에게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을 보여주면 미국의 간접 지원으로도 베트남에서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케네디는 베트콩에 대한 월맹의 조직적 지원을 인정하면서도 전쟁은 17도선 이남에서 월남군이 싸워 이겨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비정규전에 관한 훈련을 받은 한국의 100만 인적 자원을 베트남에서 활용하자는 제안을 고맙다며 옆으로 밀쳐놓았고 맥나마라는 이를 원조 미끼로 치부했다. 존슨은 머지않아 베트남 전쟁의 주적을 하나로 뭉친 공산세력으로 설정하고 대규모 미군의 파병을 결정한다. 존슨과 박정희는 전략적으로 눈이 맞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길주 / 버겐커뮤니티칼리지 역사학 교수

2015-04-08

[역사다큐-박정희, 린든 존슨, 그리고 베트남전쟁] ⑥속 시원한 답을 달라…박정희는 외교적 결례에도 '원조 확답'을 원했다

맥나마라는 박정희의 파격적 파병제안 뒤에 도사리고 있는 한국의 원조 요구를 보았다. 그가 나중에 한국군 파병이 큰돈 들어가는 일이라며 손사래를 친 자체가 박정희의 집념과 집요함을 말해준다. 파병문제는 맥나마라와 상의하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박정희는 다시 경제.군사 원조 이슈를 꺼냈다. 박정희는 말 그대로 고장 난 전축이었다. 이에 더해 다시 돌아갈 때 마다 볼륨이 더 높았다. 그는 이미 한국과 미국에서 러스크를 위시한 케네디 측근들로부터 미 의회의 해외원조 삭감과 재조정 요구에 대해 여러 번 설명을 들었다. 그래도 막무가내였다. 정상회담은 공동선언까지도 사전 동의를 한다. 만나기도 전에 합의내용이 정해진다. 또 사전 조율을 통해 회담을 경직시킬 수 있는 예측 불가능한 요소들을 없앤다. 박정희는 자신의 요구에 대한 케네디의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물고 늘어졌다. 새로운 원조 방침을 모두 재고하라는 요구가 아니다. 한국에 중요한 부분에는 예외 조항을 둘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박정희는 이 순간 차트의 귀재다웠다. 5.16 전후를 비교해 그간 혁명정부의 성과를 설명하는 일종의 증빙 서류를 만들어왔으니 참고하라고 했다. 케네디도 작심하고 설득전을 펼친 사실이 대화기록의 행간에서 읽혀진다. 'President went into some further details'라고 한 것으로 보아 재정문제를 조목조목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재정상황이 악화된 이유 중 하나는 인도차이나에서 생각보다 더 많은 돈을 썼기 때문이라 했다. 가볍게 표현해 앓는 소리를 한 것이다. 이때 케네디는 말의 톤을 바꾸어 한국이 얼마나 미국에 중요한 나라인가 토로하기 시작했다. 만약 한국이 공산화 되었다면 일본도 뒤따랐을 것이고 태평양 지역 전체가 공산세력의 위협을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한국은 미국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케네디는 이 소중한 한국을 위해 미국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옆의 맥나마라가 설명토록 했다. 다시 핵우산 얘기가 나올 것이 뻔했다. 절묘한 타이밍이다. 박정희는 혁명정부는 물론 대한민국의 사활을 국방력강화와 경제개발에 걸었다. 이 둘은 상호보완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미국은 먼저 지금도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리고 있는 60만 국군의 감축 가능성을 잊어버려라. 그리고 장비와 국방예산을 지원하라. 이미 다 아는 박정희의 요구다. 미국의 입장은 여기에 반한다. 미국의 핵우산과 전시 개입 능력을 믿고 국군의 수를 줄이면 국방비를 경제발전에 투입할 수 있다는 거였다. 집은 지켜 줄 테니 나가서 일하라는 말이다. 맥나마라는 중요한 군사비밀이랄 것도 없는 수치들을 나열한 후 미국의 전체적인 군사적 능력은 공산세계에 비해 앞서있다고 주장했다. 소련의 수소폭탄 실험 성공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핵능력은 수적으로는 3배에서 8배 질에서는 그 보다 더 앞서간다고 했다. 케네디가 마무리했다. 소련의 선제공격을 당해도 미국은 더 강력한 반격을 가할 수 있다! 국방장관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좀처럼 군사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국무장관 러스크까지 끼어들었다. 케네디의 발언을 되풀이하며 박정희가 그 뜻을 확실히 파악하길 바란다고 했다. 대통령 국방장관 국무장관이 하나가 되어 공산권을 초토화 시킬 수 있는 미국의 군사력을 믿고 한국군 감축 논의를 펜타곤에 맡기라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대한 원조에 관해서 케네디 백악관은 철옹성과 같았다. 박정희가 뚫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였다. 박정희는 포기하지 않았다. 케네디가 대화주제를 바꾸기 위해 북한 상황에 대해 말해달라고 하자 또 한 번 원조 이슈를 꺼낼 기회를 만들었다. 기막힌 대화 전술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는 북한이 공업 천연자원 면에서 크게 앞서가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 후에도 한국의 전력 생산 능력은 현재의 북한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전했다. 케네디가 해결책으로서 원자력 발전 가능성을 제시하자 박정희는 재빨리 이를 원조 문제와 결부시켰다. 원자력 발전은 너무 비용이 많이 들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미국의 지원하겠다면 고려하겠다고 했다. 박정희는 자신의 발언이 겸연쩍었던 것 같다. 이 대목에서 그가 웃었다고 백악관은 기록하고 있다. 케네디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박정희는 남북 간의 비교를 이어갔다. 공업화에 있어서 한국은 북한에 밀린다. 남북의 분단 대치상황에서는 경제력의 차이가 다른 부분에 영향을 준다. 케네디는 이 고장 난 전축 소리 같은 호소에 귀가 따가웠을 것이다. 군대는 건드리지 말고 경제는 키워달라는 요청에 대한 '긍정적 지원 (positive support)'을 위해 자신이 워싱턴에 온 것을 알아 달라고 박정희는 말했다. 이어 그의 철저한 성격이 드러났다. 공동성명에 적힌 두루뭉술한 지지 재확인이 무엇을 뜻하나. 자신의 비전을 밀어주겠다는 거냐 아니냐. 러스크가 나섰다. 정확한 답을 원하는 박정희를 더욱 자극했을 것이 뻔하다. 미국은 자유진영의 전체적 군사력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경제 사회적 발전을 유도해야 하는 역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이 문제를 한미 양국의 전문가들이 다룰 것이다. 이제 그만하란 뜻이었다. 서울에서 실무자들이 할 일을 갖고 자유세계를 지키고 운영해야 하는 미국 대통령에게 달려와 매달리지 말라는 얘기로도 들린다. 박정희는 끝내 외교적 도박을 했다. 가슴에 한이 맺혔던 것 같다. 결례에 가까운 내지름이었다. 시간을 많이 빼앗았다고 예의를 갖추고 난 후 떠나기 전 원조 문제에 대한 'refreshing answer'를 들을 수 있냐고 물었다. 우리말로 '속 시원한 답'이라고 한 것 같다. 말을 돌리지 말라는 간절한 호소다. 케네디의 답에서 한기가 느껴진다. 이미 하겠다고 말한 것을 실천하는 것이 옳지 할 수 없는 것을 하겠다고 할 수는 없다. 이어 케네디가 위로의 뜻으로 한 말은 그렇지 않아도 실망한 박정희를 불쾌하게 했을 것이다. 세계 전체를 폭파해버리기에 충분한 핵능력을 갖고 있다는 말이 "의장님에게 용기를 주었을 수도 있겠네요."라고 했다. 앞서 장황했던 맥나마라의 미국 핵전력 자랑을 상기시킨 것이다. 한반도에서 전쟁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서는 먼저 병력 규모에서 시작되는 재래식 군사력이 중요하다고 믿었던 박정희에게는 동문서답이었다. 그럼에도 케네디는 박정희가 워싱턴까지 와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는 기분을 갖고 떠나길 바라지 않는다며 자신이 안고 있는 중대한 문제들을 인식했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했다. 재정악화 의회의 압박 인도차이나 등의 난제가 산적하니 미국을 이해하고 실망하지 말라는 거였다. "내게 가장 시급한 일은(most urgent task) 군사력을 유지하면서 동시에(at the same time) 경제를 건설하는 것이다" 방점은 '동시에'에 찍힌다. 도대체 몇 번인지 셀 수 없이 박정희가 외친 말이다. 하지만 백악관은 의전과 외교적 언어를 동원해 박정희의 호소를 피해갔다. 그래도 얻은 것이 있다. 두 가지다. 박정희의 집념만큼은 워싱턴의 그 많은 돌기둥처럼 케네디 정부의 의식 속에 굳게 세워놓았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박정희가 워싱턴에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은 미국이 필요로 하는 것을 한국도 손에 쥐고 있어야 한다는 외교의 펀더멘탈이었다. 이익.이득의 개념을 무색하게 하는 우정은 외교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방관계는 가능하다. 서로에게 줄 것이 있을 때다. 이길주 / 버겐커뮤니티칼리지 역사학 교수

2015-04-01

[역사 다큐-박정희, 린든 존슨, 그리고 베트남전쟁] ④박정희 방미의 의미… 케네디의 원조 유지는 결국 '계산'이 깔려 있었다

1961년 11월 박정희와 케네디 회담에 대해 혁명정부 관계자들은 물론 많은 역사가도 아주 후한 점수를 주어왔다. 5.16 이후 박정희에게 의구심이 들고 있던 케네디를 지지로 돌려놓고 지속적인 미국의 원조를 확보했다는 분석이다. 혁명정부는 박정희의 방미 성과를 정리한 홍보 책자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꼼꼼히 따져야 한다. 박정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얻었는가. 미국은 어떤 선물을 그에게 안겼는가. 주한 미국대사 새뮤얼 버거의 표현이 가장 정확했다. 미국은 박정희에게 우호적(friendly)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었다. 박정희와 케네디의 만남은 반세기가 지났다. 그 세월은 미국 대통령과 같이 식사하고 사진 찍고 두리뭉실한 표현들로 채워진 공동성명을 획기적 성과로 포장하는 의식구조에서 떨쳐내도록 요구하고 있다. 박정희의 워싱턴 방문은 상징성에서는 성공 실질적 성취에서는 실망이다. 박정희를 맞이하기 위해 부통령 린든 존슨이 공항에 나왔다. 백악관에서 세 차례나 케네디와 만났다. 미국은 "한국의 장기적인 경제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모든 가능한 경제원조와 협력을 계속 제공할 것을 확약했고 공산주의의 팽창에 대처하는 공동 이익을 인정하여 군사원조를 제공할 것도 재확인했다"고 했다. 하지만 박정희는 외형적 환대 추상적 지원 약속을 위해 워싱턴으로 달려간 것이 아니란 점이다. 그는 아주 구체적인 지도자였다.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24억 달러가 들어가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대한 지원과 60만 한국군의 감축 논의를 종식하고 전력증강을 위한 지원을 하겠다는 글자 그대로 '확약'을 받고 싶었다. 박정희는 확신했다. 이 지원은 한국을 위한 미국의 은혜가 아니라 미국 자신을 위한 장기적 투자이다. 박정희의 비전을 미국이 어느 정도 수용했나를 따져야 한다. 케네디가 박정희에게 준 선물은 있다. 혁명정부의 대표성을 인정하고 한국에 대해 계속 지원할 것은 확실히 했다. 하지만 이것을 케네디가 박정희에게 안겨준 특별한 선물이라 말할 수 없다. 5.16은 이미 기정사실이고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지도자였다. 케네디가 혁명정부에 대해 의구심을 버리지 않았다 해서 원조를 중단하거나 규모를 갑자기 줄일 가능성은 없었다. 그것은 제 발등에 도끼를 떨어뜨리는 일이었다. LA타임스의 표현이 정확하다. 미국이 한국을 포기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투자를 했다. 이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은혜사관(恩惠史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미국은 우리를 지켜준 맹방이라고 시작되는 대미 역사관을 말한다. 미국은 한국을 보호하면서 미국의 이익을 지켰다. 물론 엄청난 희생을 치른 사실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전후 미국은 아시아에서 세 개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다. 첫째는 공산화된 세계 인구 4분의 1을 차지하는 중국을 견제하는 일이었다. 둘째는 전쟁으로 무너져 내린 일본을 재건하는 일이었다. 셋째가 동남아에서 일고 있는 반제국주의 투쟁에 대항하는 일이었다. 미국이 이 일을 하는 데 있어 한국은 꼭 필요한 존재였다. 한국은 자유진영의 방어벽이고 전초기지이다. 케네디 안보 보좌관 맥조지 번디의 표현대로 한국은 대륙 공산 세력의 심장을 향해 있는 칼끝이다. 이 칼끝을 지키자고 미국은 3만3000의 생명을 6.25전쟁에서 잃었다. 대한 원조만 30억 달러. 60년대 초 한국에 6만 명 가까운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미국이 어떻게든 지켜야 하는 아시아의 최대 요충지가 한국이다. 박정희의 한국 스스로 이 칼을 더 단단하고 뾰족하게 하기 위해 담금질하고 날을 세워야 한다고 외쳤다. 군인 박정희가 미국의 핵 능력을 모를 리 없다. 미국의 핵우산이 초강력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한국은 그 우산 밑에서 안주할 상황이 아니었다. 미국의 핵이 무서워 군사행동을 취하지 못할 북한이 아닌 것은 지금이나 반세기 전이나 마찬가지이다. 지독한 아이러니로 들리지만 일단 미국에 의지해 나라의 자주권을 찾겠다는 것이 박정희의 비전이었다. 그래서 박정희에게 경제와 군사력은 동전의 양면이었다. 박정희 방문을 앞두고 케네디 정부는 미국이 원하는 바를 목록별로 정리했다. 비밀문서였다. 첫째가 박정희의 위상을 높여 주는 일이다. 타임지 표현으로 쓴 침을 삼키고 박정희에게 미소를 보였다. 박정희를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을 위해서다. 박정희는 한국에 변화를 가져오고 미국의 이익을 지켜줄 리더이다. 그만한 소양과 성향을 가진 리더가 미국의 가시권에 없기 때문이다. 미국이 그를 지지한다는 이미지를 만들어야 그에 대한 잠재적 도전세력이 약화할 것이고 미국이 가장 두려워한 쿠데타가 또 다른 쿠데타를 불러오는 악순환을 피할 수 있었다. 베트남의 교훈을 돌아보면 된다. 베트남에서의 미국의 결정적 실책은 월남 군부가 쿠데타의 마력에 빨려 들어가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이다. 끝내 미국 스스로 세워놓고 지지해온 고 딘 디엠 대통령마저도 쿠데타군에 의해 처형되도록 내버려뒀다. 그 후로 미국은 호치민의 영도 아래 똘똘 뭉친 월맹을 쿠데타의 가능성이 남아있는 그대로인 월남 군부를 앞세워 싸우려 했다. 어쨌든 미국의 첫 번째 목표는 쿠데타 없는 한국이었다. 박정희가 곧 대면할 케네디는 "세계 시민 여러분 미국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 줄 것인가 묻지 말고 인간의 자유를 위해 무엇을 함께 할 수 있는가를 물어보십시오"라고 외쳤던 인물이다. 미국에 손 벌릴 생각만 하지 말고 미국이 이끌고 있는 자유세계에 보탬이 돼 달라는 얘기였다. 이미 시나리오에 있었다. 박정희에게 미국은 의회민주주의 나라인 것을 인식시켜야 한다. 의회는 국민과 유권자의 생각과 판단에 민감해야 한다. 미국의 대한 원조도 의회가 정한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미국으로부터 많은 원조를 받으려면 국민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실제적인 경제 사회적 개혁을 통해 미국인과 의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쿠데타를 정국불안의 산물과 원천으로 생각하는 미국인들의 판단에 한국에 줄 수 있는 원조가 직결되어 있다는 애기다. 어느 쪽으로 보나 박정희에게 케네디는 힘든 대화 상대였다. 또 케네디의 보좌관들은 박정희가 사사건건 백악관과 직접 상대하려 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미국 대사를 위시한 주한 미국 관리들이 백악관이 정책을 수립하는 데 있어 '주요한 역할(key role)'을 하고 있음은 강조하라 했다. 풀이하면 혁명정부를 매일 가까이서 상대하고 평가하는 주한 미국대사관의 판단에 따를 것이니 잘 알아서 하라는 메시지다. 박정희에게 아주 민감한 부분이었다. 주한 미국 대사관이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비판적이었던 사실은 나중에 이 지면에 설명될 것이다. 끝으로 케네디는 박정희에게 미국의 힘과 능력에 대한 강한 인상을 심어주어야 했다. 군사 교육과정을 밟기 위해 잠시 미국을 다녀간 것 외에는 미국과 관계가 없었던 박정희가 미국이 무엇을 할 수 있나 확실히 알아야 미국을 믿고 의지하며 따를 것이란 뜻으로 읽힌다. 굳이 박정희와 케네디 회담의 승자와 패자를 정한다면 워싱턴포스트의 관찰대로 비긴 게임이다. 동점도 예상 밖의 놀라운 성과다 하지만 발언 내용에서는 박정희가 이겼다. 구체적으로 많은 원조를 받아내서가 아니다. 이유는 단 하나다. 박정희의 생각은 정리됐고 말에는 호소력이 있었고 스타일에서는 집요했다. 외교적 결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원조 문제를 물고 늘어졌다. 그에게 대한민국은 싸우며 건설할 수 있다는 신념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박정희와 케네디의 한판 승부를 복기해 보기로 한다.

2015-03-25

[역사 다큐-박정희 린든 존슨 그리고 베트남전쟁] ②냉정한 케네디…'월남 파병' 품고 갔으나 '백악관 찬바람'에 실망

존슨과 회담하기 위해 오벌 오피스에 앉은 박정희는 1961년 11월을 떠올리며 달라진 자신의 위상을 피부로 느꼈을 것이다. 그는 이제 '미스터 프레지던트'로 불렸다. 더는 장군 또는 의장이 아니었다. 존슨 정부는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3년 6개월 전 같은 곳에 앉았을 때 박정희는 백악관의 주인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눈치를 살펴야 했었다. 5.16 이후 6개월 만에 워싱턴을 방문한 그는 반란군의 리더였다. 해방 직후의 혼돈 한국전쟁 4.19와 같은 역사의 도전과 시련을 이기고 이제는 한국도 '나라 만들기(Nation Building)'에 전념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을 갖기 시작한 시점에 그는 정부를 전복시켰다. 헌법적이지 않은 방법을 통해 지도자가 탄생한 역사가 없는 미국 정부에 박정희가 곱게 보였을 리 없다. 더욱이 상대는 케네디였다. 케네디만큼 박정희와 어울리지 않는 상대도 없을 듯하다. 케네디는 ABCDE로 정리할 수 있다. Affluent(부유) Bookish(학구적) Cultured(문화적) Debonair(신사적) 그리고 Engaging 즉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다. 보스턴의 대표적 부유 집안에서 자란 하버드 출신 케네디는 대필 의혹이 있기는 했지만 무게 있는 역사 인물전을 써서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의 주변에는 내로라하는 학자.문인.언론인.예술가 등이 끊이지 않았다. 잘 알려진 대로 할리우드 스타들과도 가까웠다. 멋있는 외모와 매끄러운 매너가 그의 인기에 일조했다. 케네디의 이미지에 박정희와 연관된 키워드를 대비시켜 보면 이 둘의 양극성이 쉽게 보인다. 가난.군인.과묵.고독 등과 기존 질서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고 부조화했던 반골기질. 주위 사람들이 받은 박정희의 첫 인상은 대충 두 개로 정리된다. 작은 키와 검고 마른 얼굴. 부인 육영수 여사도 처음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니 뛰어난 외모가 아님은 확실하다. 이 두 지도자의 차이는 성품 이미지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박정희는 케네디의 원대한 비전에 흠집을 낸 인물이다. 그의 에고에 상처를 냈다. 미국을 새로운 역사의 지평으로 이끌고 나갈 횃불로 자신을 파악했던 케네디다. 그의 취임사는 한편의 서사시처럼 읽힌다. '오늘'은 하나의 '끝'과 또 하나의 '시작'을 상징한다고 했다. 자신의 등장을 옛 것의 마지막 새 것의 첫 걸음으로 상정하려면 상당한 자신감이 요구된다. 케네디는 모두가 공존 공영하는 새로운 세계 질서를 짜겠다고 했다. 강자는 정의롭고 약자는 지켜지고 평화가 유지되는 세상이다. 그가 말한 약자란 열강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빈곤한 나라들이다. 케네디는 이들에게 두 가지를 약속한다. 자유와 자조(自助). 자유를 누리며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돕겠다고 했다. 만일 자유사회가 가난한 다수를 도울 수 없다면 부유한 소수도 안전할 수 없기 때문이라 했다. 미국인들과 자유세계를 가슴 벅차게 한 이 선언 후 4개월 뒤 박정희는 고작 3500명의 반란군으로 미국의 대표적 지원국가 60만 대군의 나라 한국의 합법 정부를 뒤엎었다. 쿠데타를 보고받은 케네디가 "절망적 상황(a hopeless situation)"이라며 좌절감을 드러낸 사실은 잘 알려졌다. 이토록 그를 실망케 한 반란의 주인공이 백악관을 찾아왔다. 케네디가 백악관 정문에서 박정희를 영접하는 사진을 보자. 철 지난 은어에 '썩소(笑)'란 것이 있다. 케네디의 어색한 웃음이 바로 그것이다. 엷은 미소가 입 주변에 맴도는 듯하지만 얼굴 전체에는 긴장감이 느껴진다. 케네디가(家) 사람들은 이를 훤히 드러내며 웃는다. 특히 형 밑에서 법무부 장관을 지낸 로버트 케네디와 막내 에드워드 케네디 전 연방상원의원의 치열 노출 웃음은 유명했다. 박정희를 맞는 케네디에게 그런 웃음은 없었다. 오히려 박정희가 더 편해 보였다. 줄곧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권위적으로 보였지만 잘 웃었고 케네디와 달리 양복 윗도리 단추를 풀어 놓은 모습도 자주 카메라에 잡혔다. 박정희는 미 언론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다. 미국의 신문.잡지들은 박정희를 이해할 수 없는 옹고집으로 혁명정부를 권위주의적 폐쇄집단으로 묘사하면서 그의 외모를 자주 걸고 넘어졌다. 시사주간지 'TIME'은 그에게 별칭을 가장 많이 붙여준 언론 매체다. '매의 얼굴을 가진 수수께끼(hawk-faced enigma)' '무표정하고 뾰족한 눈을 가진 보스(the flinty gimlet-eyed boss)' 심지어는 '촌놈(country boy)'이란 표현도 있었다. 겉보기에 박정희와 케네디의 만남은 의전과 외교적 수사 측면에서 모자람이 없었다. 케네디와 그의 주요 장관들은 적잖은 시간을 박정희와 함께 보냈다. 특히 한.미 공동성명은 시쳇말로 '표준답안'이었다. 혁명정부를 치켜세우면서 양측이 모든 면에서 의견 일치를 보았다고 했다. 하지만 정중함 속에 냉정함이 있었다. 혁명정부를 향한 미국의 메시지를 정리하면 '아직 잘 모르겠으니 두고 보자'였다. 박정희가 이 조심스럽고 어정쩡한 태도를 인지하지 못했을 리 없다. 똑 부러지는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워싱턴 방문에 앞서 박정희는 딘 러스크 국무장관을 통해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받았다. 1961년 11월 5일 청와대로 박정희를 찾은 러스크는 먼저 경제 정치 사회 등 모든 면에서 한국을 새롭게 하려는 혁명정부의 노력을 지지한다는 외교적 발언을 했다. 이어 케네디가 베를린사태로 야기된 세계적 긴장국면에 대해 대화하길 원한다고 전했다. 소련이 자유세계와의 정면충돌 코스로 들어선 것 같다는 얘기를 하려는 의도였다. 러스크 방한 5일 전인 10월 30일 소련은 수소폭탄 공중 투하 실험에 성공했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 폭탄의 3800배 파괴력을 과시했다. 흐루시초프가 서방을 매장하겠다고 소리친 지 5년 만에 이룬 성과였다. 같은 시기 베를린에는 장벽이 세워졌다. 서방은 초긴장의 상태였다. 박정희가 방미할 즈음의 상황을 정리하면 이렇다. 혁명정부는 경제발전에 사활을 걸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란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키로 했다. 미국은 원조 수혜국의 장기적 발전을 목표로 설정한 만큼 도움을 기대할 만했다. 하지만 미국은 새로운 형태의 적을 상대해야 했다. 수소폭탄 투하 능력에 힘입어 세계 곳곳에서 큰 규모의 도발을 자행할 태세를 갖춘 상대이다. 베를린.쿠바.한국.인도차이나 등이 가능성 있는 표적이다. 미국은 제한된 재원을 영리하게 사용해야 했다. 소련의 정면 도발을 억제할 능력 배양에 집중 투자해야 한다. 박정희가 댐.공장.도로 신설을 갈망하지만 지금은 이를 위한 원조제공이 미 정부의 최우선이 아니다. 박정희는 글로벌 긴장상태에 직면한 미국에 더 구체적이고 공격적인 제안을 하기로 했다. 평생 군인 박정희는 반공을 하겠다며 쿠데타를 일으킨 인물이다. 그의 휘하에 60만 대군이 있다. 그의 전략적 계산에 월남이 들어왔다. 베트남은 베를린만큼은 안 돼도 동.서 충돌의 상징으로 미 외교 및 군사 정책의 도전으로 급부상 중이다. 박정희는 한국군의 월남 파병 카드를 가슴에 품고 케네디를 만나러 태평양을 건넜다. 그러나 케네디의 냉랭함에 실망한다. 이길주 / 버겐커뮤니티칼리지 역사학 교수

2015-03-18

[사고]'역사 다큐-박정희, 린든 존슨, 그리고 베트남전쟁' 오는 16일부터 연재합니다

뉴욕중앙일보가 창간 40주년을 맞아 오는 16일부터 매주 월.목요일자에 '역사 다큐-박정희 린든 존슨 그리고 베트남전쟁'을 연재합니다. 올해는 한국이 베트남전에 전투병을 보낸 지 꼭 반세기가 되는 해입니다. 1964년 9월 의료진과 태권도 교관 파병에 이어 65년 10월 9일 해병대 청룡부대가 전투병으로는 처음 베트남에 상륙했습니다. 한국군은 이후 73년 휴전 때까지 전장을 지켰습니다. 베트남전은 미국은 물론이고 한국 근.현대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 개발과 국군 현대화에 국운을 걸고 참전 대가로 미국에 집요하게 돈 장비 전략적 발언권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린든 존슨 대통령은 이 요구를 들어줬습니다. 그 역시 국제적 연합전선을 형성해 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하겠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베트남전을 계기로 원조에 의존하는 국가에서 스스로 앞길을 닦아가는 능동적 국가로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이는 한.미 양국 대통령이 베트남전을 통해 이루려는 또 하나의 장기적 전략이기도 했습니다. 과묵이 트레이드마크였던 박정희 대통령과 다변.달변으로 유명했던 존슨 대통령. 겉보기로는 어울리지 않는 이 두 지도자의 정책적 의기투합과 자신들의 신념을 전쟁터에서 펼쳐 보이는 과정 또 이들이 나눈 고뇌와 영욕 등을 풀어가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역사의 교훈을 새겨보고자 합니다. 필자는 버겐커뮤니티칼리지 역사학과 이길주 교수(인터뷰 A-4면)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2015-03-11

[인터뷰] 본지에 '역사 다큐' 연재하는 이길주 교수…'한강의 기적' 원동력은 월남전 참전이었다

“베트남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선사하고 싶습니다.”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둘로 나뉜다. ‘미국에 고용된 용병’ ‘공산주의에 맞선 자유수호의 용사’라는 상반된 입장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 버겐커뮤니티칼리지 역사학과의 이길주(사진) 교수는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이 50년이 지난 현재 베트남전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오는 16일부터 '역사 다큐-박정희, 린든 존슨, 그리고 베트남전쟁' 연재를 통해 그간의 이데올로기적 접근을 넘어 베트남전이 한국의 국가 발전에 미친 영향을 소개할 계획이다. 그는 “베트남전 참전은 아시아의 최약소국으로 꼽혔던 한국에 있어서 엄청난 도박을 한 셈”이라고 지적했다. 해방 후 거듭된 혼란으로 인해 미국의 원조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한국이 경제 발전과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겠다는 목표 달성을 위해 과감하면서도 능동적인 선택의 결과라는 시각이다. 이 교수는 “베트남전 참전은 목표를 위해 앞만을 바라보고 옆을 보지 않겠다는 일종의 선언이라고 볼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스스로 앞길을 닦아 나가는 능동적 국가로의 변신을 위해 베트남전을 일종의 불도저로 쓴 셈”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불도저가 평탄하지 않은 길을 내달렸기 때문에 당연히 무리함도 따랐다. 하지만 돌파구를 찾기 위한 능동적이면서 진취적인 선택이기도 했다”면서 “이처럼 베트남전이 갖고 있는 다양한 의미들을 한인들과 함께 되짚어보고 싶다. 특히 이민이라는 적극적인 선택을 한 한인들에게 베트남전이 주는 의미는 적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베트남전을 중심으로 한 1960년대 한·미 양국 관계를 박사 논문을 쓰는 등 이 분야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학자다. 또 최근에는 대학 캠퍼스를 넘어 뉴저지주 테너플라이의 KCC(한인동포회관)에서 미국 역사 강좌를 시작하는 등 한인들에게 다양한 지식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서한서 기자 seo.hanseo@koreadaily.com

2015-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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